리뷰

[책] 아직 살아있습니다

coramdeo2021 2021. 7. 28. 02:45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ㅡ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쓰인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오늘의 젊은 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오늘의 젊은 문학: 오늘과 내일을 잇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젊은 소설가들의 장단편 소설을 엮은 시리즈

평소에 SF 서스펜스 장르는 잘 읽지 않는다.
작가도 처음이다.
하지만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너무 좋다.

책을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제목처럼 아직 살아 있다.
원래「아직 살아 있습니다」의 2017년 현대문학 발표 제목은 닮은 얼굴이었다.

그 어느 이야기보다도 생생하고 진짜 같다. 다소 낯선 더미 이야기마저도 현실인듯 착각하게 만든다.
사실 낯선 장르라 읽다가 정신을 놓은 적이 몇 번 있지만 작가의 경계 없는 상상력이 충분히 재미있다.


죽었지만 로그아웃 되지 않은 박 대리(「아직 살아 있습니다」), 어금니로 갈수록 누렇게 변색된 치아, 때운 흔적과 치석으로 얼룩져 있는 입안(「틈」), 방직 공장 기계에 말려 들어가 으깨졌으나 어딘가 떠다니
는 윌슨의 왼손(
「윌슨과 그의 떠다니는 손」), 밤만 되면 속옷 바람으로 대로변을 돌아다니는 중국인 할아버지(「중국인 부부」), 의뢰인을 대신해 오른 에베레스트에서 동상으로 괴사한 왼쪽 귀(「메켈 정비공의 부탁」), 도덕적인 아내가 매일 차려내는 밥상(「로드킬」), 사교클럽의 오와 교(「목요일 사교클럽」), 절벽에서 잡아당긴 가름끈(「책무덤」), 알지 못하는 M과 J(「한남동에는 점집이 많다」)

눈물 없이 우는 얼굴이란 재채기를 참는 얼굴과도 비슷했다. p.12

그 실없는 소리를 분명 이전과는 다른 온도로 마음에 달라붙었지만 나는 애써 그 부분을 모른 척했다. p17

나는 그처럼 자신의 죽음에서 소외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p27

생활도, 미래도 없는 이곳에서 그저 '있는 것'을 과연 사는 것이라 할 수는 있는 건지, 그가 아닌 나는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p.30

모든 부분에 밑줄이 쳐진 책은 결국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p.37

삭제하면 될 정도의 감각. p.164

하지만 너는 그와 동시에 정말로 네가 푸아 씨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정비공의 말처럼 너도 결국 그들 중 하나니까. 거대한 연극 안에서 너는 주인공이었으니까. 네가 배우에 불과했다는 건 이제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해. p.273

남자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살짝 웃었어. 너는 그 웃음을 보며, 네가 잘못 반응했다는 걸 깨달아. 당신이 그 사람 자리에 있으니까. p.245

J가 하필이면 한남동이냐고 물었을 때, M은 한남동에 유명한 점집이 많다고 대답했다. p258
간혹 모험의 시대를 잊지 못하고 밤마다 거리로 나서는 이가 있대도, 방랑자의 길(route)은 일상(routine)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p.265

반복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은 두려움을 없애준다. p.265

소설은 갑작스레 찾아온 상실이 일상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마주하였을 때 방어기제가 어떻게 일상을 부여잡는지 인물의 내면을 통해 보여준다. 어쩌면 이들의 모습에서 상처를 묻어둔 채 일상에 매달리고 있는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니 조금은 긴장한 채 책을 펼쳐야 한다. p266

윌슨의 어리석음은 일관성이 있어서, 그는 아내를 놓치듯 눈앞에 없는 왼손을 붙잡느라 왼손을 제외한 몸과 마음 전체를 잃는다. p.268

그의 행동은 그녀의 불안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문제의 원인은 이미 그녀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p.269

이처럼 일상이란 찢어지기 쉬운 얇은 베일일 뿐일지도 모른다. p.269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수행한다면, 수행하는 이가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p.271

물론 이 모든 의미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연국이 아닌 진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p.274

상실을 견디는 또 다른 선택지는 반복되는 루틴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상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p.274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남자는 안도할 수 있다. 그러니 남자가 후회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자기 상처를 직시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오래전 그날 루틴을 어겼다는 것뿐이다. p.276

오늘날 우리에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삶이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안정된 것이라 여겨진다. p.276

안정된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규칙적인' 출퇴근이 '오래' 보장되는 직업을 찾는 일일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p.277

'나'의 부부는 노인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할' 동족인 것일까. p.277

나푸름의 소설은 일상 너머에 숨겨진 불안을 감지하고, 그것이 삶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p.277

소설이 안내하는 질문의 끝엔 아마도 낯선 '바깥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278

- 해설 「솔베이지의 선택지」 이지은(문학평론가) 중에서
이 세계가 실은 무수히 많은 균열의 감각을 외면하는 힘으로 지탱되는 세계라는 생각. 그 외면의 힘으로 얻은 일상의 무사함은 과연 무사함일까. 김선재(소설가)

나푸름 작가의 소설은 숨 막히게 진짜 같다가 다음 순간 완전히 낯설어진다. 이다혜(≪씨네21≫ 기자, 작가)
포기하지 않아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나는 소설을 통해 알았다. p.283 「작가의 말」 중에서


나푸름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로드킬」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푸름
다산책방